(아래는 여러 현장 사례를 바탕으로 구성한 이야기입니다. 인물은 가상이지만, 법과 절차는 모두 실제입니다.)
## 1. 첫 번째 심부름
김 반장이 그 아파트에 온 건 작년 11월이었다.
예순셋. 전에 다니던 공장이 문을 닫고 반년을 쉬었다. 아들이 알아봐 준 자리였다. 격일제, 세전 251만 원.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첫 주는 조용했다. 순찰 돌고, 택배 받고, 분리배출 감시하고. 몸은 고됐지만 마음은 편했다.
문제는 셋째 주에 시작됐다.
1204호 남자가 경비실 창문을 두드렸다. 오십 대 초반, 늘 정장 차림이었다.
“반장님, 저 지하 3층 B구역에 세워둔 흰색 차 있잖아요. 그거 좀 앞으로 빼주세요. 키는 여기.”
김 반장은 잠깐 멈췄다. 대리주차는 경비 업무가 아니다. 교육 받을 때 들었다.
그런데 남자가 키를 창구에 놓고 이미 등을 돌리고 있었다.
“급해서요. 부탁드립니다.”
그날 김 반장은 차를 옮겼다.

## 2. 한 번이 열 번이 되는 방식
한 번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다음 주에 남자는 또 왔다. 이번엔 세차였다. “물만 좀 뿌려주시면 돼요.”
김 반장이 곤란한 표정을 짓자 남자가 웃었다.
“에이, 지난번엔 해주셨잖아요.”
이게 그 구조다. 한 번 응한 것이 근거가 된다. 다음번에 거절하면 갑자기 태도가 나빠진 사람이 된다.
12월엔 이사 짐 옮기기를 도우라고 했다. 1월엔 개인 창고를 정리하라고 했다. 김 반장이 “제 업무가 아닌 것 같습니다”라고 처음 말한 건 1월 중순이었다.
남자의 얼굴이 굳었다.
“경비가 그런 것도 안 하면 무슨 경비예요? 우리가 관리비 내는데.”
## 3. 관리소에 갔던 날
김 반장은 관리소장을 찾아갔다.
소장은 삼십 대 후반 여자였다. 서류에서 눈을 들지 않고 말했다.
“아, 1204호요. 그분 좀 그러시죠.”
“업무가 아닌 것 같아서요.”
“맞아요. 아닌데… 반장님, 그분이 동대표세요.”
그리고 잠시 뒤에 덧붙였다.
“3월에 계약 갱신이거든요. 좀 참으시면 어떨까요.”
김 반장은 알겠다고 하고 나왔다.
이 대화가 왜 중요한가. 여기서 김 반장은 두 번 혼자가 됐다. 부당지시를 받는 것에서 한 번, 도움을 청했는데 거절당한 것에서 또 한 번.
그리고 대부분의 경비원이 이 지점에서 멈춘다. 계약 갱신이 걸려 있으니까. 신고하면 3월에 잘릴 테니까.

## 4. 법은 이미 있었다
김 반장이 몰랐던 게 있었다.
공동주택관리법 제65조. 흔히 경비원 갑질 금지법이라고 부른다.
이 조항은 입주자대표회의와 입주자 등이 관리사무소장이나 경비원 같은 근로자에게 다음을 하지 못하도록 정하고 있다. 폭행하거나 협박 등 위력을 쓰는 것. 정당한 업무를 방해하는 것. 부당하게 간섭하는 것. 그리고 업무 이외의 지시나 명령을 하는 것.
대리주차, 세차, 개인 짐 옮기기. 김 반장이 넉 달 동안 해온 일들이 모두 여기 해당한다.
이 법이 왜 생겼는지도 알아둘 값이 있다. 2020년, 서울의 한 아파트 경비원이 입주민의 지속적인 괴롭힘 끝에 세상을 떠난 일이 있었다. 그 일이 계기가 되어 법이 개정됐다.
2021년에는 시행령도 손봤다. 시·도지사가 관리규약 준칙에 괴롭힘 금지, 신고 방법, 피해자 보호조치, 그리고 신고를 이유로 해고 등 불이익을 주지 못한다는 내용을 담게 했다. 각 단지는 그 준칙에 따라 관리규약을 고쳐야 했다.
즉 김 반장이 다니는 아파트 관리규약에도 이 내용이 이미 적혀 있었다. 아무도 그에게 알려주지 않았을 뿐이다.

## 5. 다만 법에는 구멍이 있다
솔직하게 말하겠다. 이 법은 완전하지 않다.
가장 큰 문제는 금지는 해놓고 처벌 규정이 명확하지 않다는 점이다. 하지 말라고는 하는데, 하면 어떻게 된다는 부분이 약하다. 그래서 실효성 논란이 계속돼 왔고, 2026년 초에도 처벌 규정을 새로 넣자는 개정안이 국회에 발의됐다.
두 번째 문제는 고용 구조다.
김 반장의 서류상 사용자는 용역업체다. 그런데 실제로 그를 괴롭히는 사람은 입주민이다. 근로기준법의 직장 내 괴롭힘 금지 조항은 사용자와 근로자 사이를 전제로 하는데, 입주민은 서류상 사용자가 아니다. 그래서 적용이 애매해진다.
세 번째는 1년 계약이다. 3월에 갱신을 받아야 하는 사람이 1월에 동대표를 신고할 수 있겠는가.
법이 있어도 작동하지 않는 이유가 이 세 가지다.
## 6. 김 반장이 한 일
그런데 김 반장은 신고를 하지 않았다. 대신 다른 것을 했다.
기록을 시작했다.
근무일지 여백에 날짜와 시간을 적었다. 1월 18일 21시 40분, 1204호 요청으로 지하 3층 차량 이동. 1월 25일 07시 10분, 1204호 세차 요청, 거절함. 2월 3일 19시 20분, 1204호 “경비가 그것도 못 하면 뭘 하냐” 발언.
그리고 남자가 보낸 문자를 지우지 않았다. 관리소장과 나눈 대화도 그날 저녁에 요약해서 적어뒀다.
세 달을 그렇게 모았다.

## 7. 3월
계약 갱신 시기가 왔다.
관리소장이 김 반장을 불렀다. 그리고 조금 다른 얘기를 했다.
“반장님, 1204호 문제 말인데요. 제가 이번에 입대의에 안건으로 올려보려고요.”
김 반장이 물었다. “왜 갑자기요.”
소장이 잠깐 말을 골랐다.
“저도 그 사람한테 시달려서요. 그리고 반장님이 기록을 갖고 계신다고 들었어요.”
기록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힘이 됐다. 소장은 김 반장이 언제든 신고할 수 있는 사람이 됐다는 것을 알았고, 그러면 관리소도 함께 책임을 묻게 된다는 것도 알았다.
김 반장은 갱신됐다. 1204호 남자는 그 후로 경비실 창문을 두드리지 않았다.
깔끔한 승리는 아니다. 사과를 받은 것도 아니고, 남자가 처벌받은 것도 아니다.

## 8. 이 이야기에서 남는 것
김 반장이 잘한 것은 두 가지다.
거절을 시작한 것. 늦었지만 했다. 그리고 거절할 때 감정을 싣지 않았다. “제 업무가 아닌 것 같습니다”라는 문장 하나였다. 이게 중요하다. 화를 내면 다투는 사람이 되고, 조용히 같은 말을 반복하면 원칙이 있는 사람이 된다.
기록한 것. 이게 결정적이었다.
기록에는 세 가지가 들어가야 한다. 날짜와 시간. 무슨 요구를 받았고 어떻게 했는지. 어떤 말을 들었는지. 근무일지에 적으면 가장 좋다. 회사가 관리하는 문서라서 나중에 신뢰도가 높다. 여의치 않으면 휴대전화 메모에 적고 사진으로 남겨두면 된다.
반대로 하지 말아야 할 것도 있다.
몰래 녹음하는 것은 신중해야 한다. 대화에 참여한 사람이 녹음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그 파일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다른 문제가 생길 수 있다. 확실치 않으면 먼저 상담을 받는 게 낫다.
동료들 앞에서 크게 문제를 만드는 것도 권하지 않는다. 소문이 돌면 “저 사람 시끄럽다”는 평가가 붙고, 그게 갱신에서 불리하게 작용한다. 조용히, 그리고 문서로.
## 9.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곳
혼자 판단하기 어려운 상황이면 여기 먼저 물어보시면 된다. 모두 무료다.
고용노동부 상담센터, 국번 없이 1350. 부당지시가 법적으로 어떻게 다투어지는지 알려준다. 익명 상담도 된다.
각 지역 노동자종합지원센터. 서대문구, 성북구 등 여러 지자체가 운영한다. 아파트 노동자 사례를 많이 다뤄봤고, 대응까지 함께 도와주는 경우가 있다.
관할 지방자치단체 공동주택 담당 부서. 관리규약에 갑질 금지가 제대로 들어가 있는지, 관리소가 의무를 다하고 있는지 확인해준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이런 일이 오래 이어지면 마음이 먼저 무너진다. 잠이 안 오고, 출근길이 두려워지고, 아무것도 아닌 일에 화가 난다. 그건 약한 게 아니라 당연한 반응이다.
그럴 때는 참지 말고 가까운 사람에게 말하십시오. 가족이든 동료든 누구든. 견디기 힘든 마음이 계속되면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것도 방법입니다.
혼자 버티는 게 미덕이 아닙니다. 김 반장도 아들에게 말했고, 관리소장에게 말했고, 그래서 기록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 10. 마지막으로
경비 일 하시는 분들께 드리고 싶은 말이 하나 있습니다.
부당한 지시를 거절하는 것은 불성실한 게 아닙니다. 법이 그렇게 정해뒀기 때문입니다. 대리주차와 세차와 개인 심부름은 우리가 계약한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오늘 거절하지 못했다고 늦은 것도 아닙니다. 김 반장도 넉 달 만에 처음 말했습니다.
지금부터 적으십시오. 날짜, 시간, 들은 말. 그것만으로 상황이 달라집니다.
오늘도 순찰 완료! (열네 번째 초소였습니다)
다음 초소에서 또 뵙겠습니다. 필승! 🫡